담배에 대한 주저리
요즘처럼 흡연자에 대한 냉소, 아니 경멸에 가까운 처사를 받았던 적은 없다
흡연자에 대한 적개심?이 나날이 증폭되고 있는 시점에서
흡연자라고 고백을 하면 마치 커밍-아웃 수준에 이를 만치
백안시 당하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얘기이다
공공장소는 물론이고, 엔간한 식당에서는 담배 한 개비 꼬나물 수조차 없는 분위기가 속출되는데, 화장실까지 슬그머니 밀려나가 피워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심내가 불편한 게 아니다.
어쨌든 간에 수 십 년간 피워 문 나 같은 골초들에게는
그 것도 지옥이다.
어찌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겠다는 각오도 해보지만
'절대건강'이라는 슬로건 앞에는 멋들어진 변명도 궁색한 수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야 만다.
그래서 만들어 낸 말이 이렇다.
'담배는 내게 있어 유익하다. 다 좋아. 그렇지만 백해무익하다' 됐습니까?ㅋㅋ
담배와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버지와 함께 여섯 형제가 드러눕던 하꼬방?에서부터이다.
여섯 형제 가운데 늦동이인 나를 유독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는
늘 당신 겨드랑이 밑에 나를 끼워 두고 주무셨는데
등화관제나 전등불이 꺼지고나서는 늘 담뱃불을 가지고
그림이나 글자를 알아 맞추는 놀이를 거의 매일 했던 기억이 그 첫 번째
그 후 어찌어찌 해서인지
중학교 이 학년 때 친구들이 피워 문 담배를 우연찮게 빨았던 게 두 번째
아마 이 두 번째 때 담배 연기를, 친구들이 하라는대로 깊이 들이 마셨다가
잠시 혼절하고 뱃속에 들어 있던 온갖 것들을 게워낸 끔찍한 기억
그래서 그 이후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입에도 안 대었던 일.
어머니는 하루에 천 원을 용돈으로 주셨다
점심값으로 학교 매점에서 파는 라면 백원, 전철비 그리고 청자 담배 한갑 사면 딱 들어 맞았던 용돈이었다.
그 때 즐겨 피우던 담배가 청자였던 것이다. 제법 용돈에 여유가 있던 친우들이 피워대는 거북선이나 한산도 등에 비해 너무 착한 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단돈 200원. 지금은 거의 2000원이 넘거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담배들이 더러 있지만
내 입은 조금 쌉쌀한 맛이 들어 있어선지 주로 쓴 담배를 피워 댔다
한강이란 담배도 맘에 들었지만 개비 수가 너무 적게 들어 있었을 뿐더러
220원 가격에 비해 절반의 수량으로는 나를 충족 시켜주진 못했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서는 솔을 고집하다가 88골드가 나오고부터는 주력종으로
피웠고 디스레드 등으로 바뀌다가 수입 담배의 범람으로 지금은 무조건
니.타 함량이 10 밀리그램이 넘는 것만 보인다면 가리지 않고 피우게 되었다.
담배의 편력은 일단 담배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거개가
나와 같은 절차를 밟아가는 게 일반화된 모습들일 것이다
이때 절차는 철저하게 담배에 자신을 맞춰 간다는 것이다
이러구러한 얘기 끝에 몇 년 전에 정리한 나와 인천 관련 담배에 대한
이바구를 간단히 정리한 게 있는 데 이를 소개하련다
동양연초상사 또는 동양연초주식회사는 1901년 그리스 사람 필립 밴들러스에 의해 인천 사동 19번지에 설립되었다. 설립당시 영국인 2명과 함께 합자회사로 출발했으나 재정상의 문제로 당시 이 회사의 지배인이었던 해밀튼이 1903년 이 회사를 이어받아 중국인 거류지였던 선린동 56~58번지 일대에 제물포지권련 연초회사를 재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원시경’ ‘거미표’ ‘열쇠표’ 등의 담배를 생산 판매를 했는데 그 판매의 독점 계약권자는 일본인 오꾸다 테지로(奧田貞次朗)였다. 담배는 제물포의 개항과 더불어 입점했던 독일의 세창양행에 의해서 이미 ‘세창 담배’라는 담배를 판매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값비싼 담배였던 세창 담배는 중국 상하이에서 제조되어 세창양행 인천지점을 통하여 판매됐는데, 일본인 판매책을 낀 동양연초회사의 담배와는 각축을 벌이던 경쟁 관계에 있었다. 한편, 동양연초상사에 앞서 1899년 12월에는 영미연초주식회사가(British America Tobacco co.) 인천에 공장을 설립해 ‘히어로’라는 담배를 판매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회사 역시 제 1공장이 있던 상해(上海)와의 거리를 감안해 인천에 공장을 설립하는 빠른 행보를 보였으리라 추정되나 구체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진위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실정이다. 그러나 이들 담배 회사의 경쟁적 설치는 무엇보다도 당시에 빠르게 파급되는 서양권련의 인기와 더불어 나날이 증가하는 판매 이익에 있었다. 급기야 담배 판매를 부추기기 위해서 담배 갑(匣)을 일곱 매 이상 갖고 오는 구매자에게 활동사진을 무료 관람케 하였고 다섯 매를 갖고 오는 사람에게는 당시에 인기 기생의 얼굴사진을 무료로 주기도 했었다. 이처럼 서양 권련이 인기가 많았던 점은 기존에 장죽을 이용한 불편을 해소해 줬다는 점도 작용하지만 정조 임금의 담배 예찬론도 무시할 수 없는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담배가 사람에게 유익한 점으로 말하면, 더위를 당해서는 더위를 씻어주는데 이는 기(氣)가 저절로 평온해지므로 더위가 저절로 물러가게 된 것이고, 추위를 당해서는 추위를 막아주는데 이는 침이 저절로 따뜻해지므로 추위가 저절로 막아지게 된 것이며, 밥 먹은 뒤에는 이것에 힘입어 음식을 소화시키고, 변을 볼 때는 이것으로 악취를 쫓게 하고, 또 잠을 청하고자 하나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이것을 피우면 잠이 오게 되며, 심지어는 시를 짓거나 문장을 엮을 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그리고 고요히 정좌(靜坐)할 때 등의 경우에도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 <홍재전서 제178권, 일득록 18, 훈어 5.> 어쨌든 1904년 이후 인천에는 일본관제담배회사(조선연초주식회사), 동양연초주식회사, 영미연초주식회사 등이 있어 새표, 북표, 홍도패, 산호, 뽀삐, 붕어표, 칼(carl)표, 자전거표 등의 담배를 생산 유통되었다가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 전매법을 시행함에 따라 일반 회사에 의한 담배 제조가 금지되고부터는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인천의 담배제조는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어쩌다 사거나 의도적인 요구에 의해 피우게 되는 담배가 '다비도프'이다
각 나라의 공항에서 똑 같이 파는 것임에도 문구는 제각각이어서
독일에서 산 담배의 문구는 좀 점잖고
태국에서 산 다비도프의 문구는 문구적 경고를 넘어서 좀 더 치명적이 사진이
게재돼 있다. 생각이 난 김에
뤼댜 님의 블로그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한 번 올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