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루(石汀樓) 유감
인천광역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의결된 사항이란다. 월미도를 비롯해 인천을 모반으로 삼고 있는 섬들을 제법 넉살스레 바라볼 수 있는 석정루를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인천각을 세운다는 것이다. 사십 여 년 동안 자유공원 서산마루를 지켜온 석정루는 알다시피 석정 이후선이란 독지가에 의해 세워진 이층짜리 정자이다. 한국전쟁의 여진이 진정되고 겨우 시민의 안정과 그 휴식공간이 절실히 요구될 무렵이던 1960년대에 해운업으로 벌어들인 부를 시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는 여러모로 매우 각별하다. 그래서인지 석정루가 자유공원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석정의 뜻을 기려 당대의 서예가 동정 박세림으로부터 현판이 제작돼 각처의 시민들이 기쁨을 나누는 등 한바탕 축제 분위기를 자아냈던 공간으로 기록되는 일은 당연한 처사이다. 인천의 역사를 한번쯤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여관 겸 레스토랑이 바로 인천각이다. 본래 상하이에서 대단위 토목공사로 부를 축적한 영국 사람이 제물포 세창양행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사위가 추천해 지은 이른바 ‘제임스 존스톤 여름 별장’이 그 처음이다. 당시의 국제 상황에서 일본과 영국은 찰 떡 궁합처럼 약소국을 식민화 하는 데에 절대적 협력관계를 지닌 제국주의의 표본이었다. 적어도 이 건물이 지어진 1905년 당시는 그러한 밀월관계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므로 시쳇말로 ‘그 놈이 그 놈’으로 불리던 때였다.
현재 인천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이후로 그 모습을 찾을 길 없고 일제 강점기에 제법 큰 기침소리를 냈던 몇몇 고로의 증언과 인천이 고향인 늙다리 일본인만이 이를 고증할 따름인 것이다. 헌데, 인천시와 도시공원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석정루의 파괴와 인천각의 재현 소식은 어딘지 모르게 억지스런 논리가 배어있음이 감지된다. 어딘지 모르게 라고 구체성이 결여된 채 말하는 이면에는 복잡한 상황 논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판단과 계획 그리고 실행으로 치닫는 과정적 모호함이 그 무게 중심에서 엇 나 있음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미래도 볼 수 없다 ”는 말이 있다. 석정루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인천각을 세우겠다고 의결한 인천시와 도시공원위원회의 역사관과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소양이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인천에 살고 있는지. 아니, 인천에서 살아 봤는지는 둘 째 치더라도 민주주의에 입각한 전문가 집단의 철학적 판단이 시민적 합의에 기준했느냐는 의문이 첫째로 꼽혀진다. 자본주의 논리에 치우쳐 용서해서는 안 될 과거의 산물을 언구럭이 이용해 카페테리아, 전망대, 기념품 판매소 등으로 전환해 지역 개발에 이바지 하겠다는 논리가 순수한 시민의 애정 어린 기여를 뭉개버리는 정당성 또한 검증됐느냐는 것도 의문시 되고 있다. 설령 유족과 행정당국이 합의했다손 치더라도 사 십 여 년간 인천시민의 마음에 심었던 아름다운 기부 정신과 인천시민의 모태인 인천 앞 바다를 여유롭게 조망케 하였던 자유와 평화 정신의 갈망에 대해서는 무어라 감언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21세기를 문화혁명기라 했다. 소위 ‘문화’라는 꼬리말을 총체적 사안들에 붙여 잘살아보겠다고 애쓰는 시점이 오늘날 우리 세계의 현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죄다 문화란 말을 쓰다보니 과거의 악습도 문화가 되고 개발 이윤의 논리에 맞다하면 소중한 삶의 흔적이 있든 말든 싹쓸이 해버려 새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문화가 돼버리는 현실이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석정루를 허물고 그 자리에 식민지시대 인천의 랜드마크라 불리던 ‘인천각’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저급하고 독선적인 행정문화의 한 예에 불과하다. 불현듯 일본 요코하마 미라토미라이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왜놈문화라고 손가락질 했던, 나머지 세 손가락이 반성의 칼날로 가슴을 후비고 되돌아온다. 관청, 학계, 지역전문가, 지역주민이 상처입지 않고 끈질기게 합의해낸 요코하마 푸른 바닷물 끈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