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 雲 堂 2008. 1. 30. 00:19

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써 놓고 보니

앞으로 줄기차게 달려가야 할 나날들이 무지기 수로 많이 남아 있음이

눈으로 확인된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게 아닌가 가늠하게 만든다

다가올 죽음이 마치 마침이 아니고

어디론가 줄기차게 전진해 나가야할 과정인 것과 같은

 

설은 처음, 첫, 꼭두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한 해의 첫날이 설날이다

까치의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가 설까치이고

풍물패 장구잽이들에서도 제일로 쳐주는 잽이가 설장고이고 설장고 가락이다

참 아름다운 말이다 '설'

 

며칠 전부터 설 준비 하느라 무척이나 바쁘게 지냈다

각종 모임과 행사, 회의 등등에 거의 참석을 하지 못했다

부리나케 전화가 빗발친다

대답은 시원하게 해 놓고 대답에 대한 책임을 지을 수 없다는 듯

침묵을 하고 만다.

뭔 뜻인지 다들 잘 알면서 의례적이되 혹시나 해서 걸었다 한다

 

탑을 만들어 올리자면서

막상 만들어 올라가보니 현실적인 상황들이

편안치 않았고 같은 말을 게우면서도

한 귀로 흘려버리게 되는, 아니 소통할 수 없는 바벨탑의 시대가

도래한 듯이 헷갈리는 말들에 차마 공염불이 될까 두렵다

'설'... 설에 대한 감상은 대개 이렇게 일에 마비돼 버려 있으므로

죄다 불통의 여건 투성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지금은 거의 일에 중독돼 있는 상태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각의 순간들이 체세포를 통해

한 곳으로 집중돼 있는 상태가 된다

 

이세기 시인으로부터 늦은 밤 전화를 받는다

늦은 밤이래봤자 일의 늪에 빠진 사람에게는 아무리 늦은 밤이라 해도

이미 밤이 아니고 말도 이미 언어의 구실에서 해방된 이탈 문자에 불과했다

어떻게 지내냐? 잘 지낸다!

몸은 좀 어떠냐? 괜찮다!

너는? 등등으로 이어지는 단답식 문항들이 채워지는 가운데

삼 십분이 자동으로 흘러갔다

핸드폰에 귀때기가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할 무렵. 잘있어 친구야!로

맺음하면서 공황장애를 앓는 놈 치고는 아니 패닉 증세를 앓고 있는

놈 치고는 제법 멀쩡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버린다

불현듯 스치는 가장 큰 이유는 마비 또는 중독돼 있는 요 기간 동안에

벌어지는 반복적인 현상에 대한 최대의 예의였다. 친구에 대한...

 

잠시 뒤에 태국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야, 친구야! 난 5일 날 잠시 한국에 경유한다

중국엘 갔다가 새벽 5시에 도착해서 오후 한 시에는

다시 독일행 비행기를 타야 해

그럼 너하고 아침과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어

넌 일하고 난 찜질방에서 눈 붙이고... 뭐 그러면 될 것 같아

그럼, 그 때 보자! 마중 나오진 마! 휘리릭~.

전화가 끊어진다.

내가 해야할 말을 잇지 못했다

올 때 내가 좋아하는 다비도프 담배를 사오라는 말을 빼 먹었다

물론 알아서 다섯 보루 정도는 사오겠지만...

 

설 대목을 향해 치달리는 잉여의 날의 일상적 과정이다

어디까지나 잉여의 나날인 것이다

그런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해 만큼 보약이 되는 게 없다

대충 전화를 받아도 이해를 해 주고

그런 가운데 알아서 잘 챙겨 주고 받으니 말이다

 

설날에 먹는 떡국은 참 과학적인 배려가 깃든 음식이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전투 식량과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겨울이라는 기나긴 절기에 오랬동안 보관이 용이한

즉석 요리라는 점 등에서 볼 때 매우 합리적인 음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용숙 교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미학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내재된 

철학적 고찰들은 모두 깊은 음양의 조화가 깃들어 있음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다분히 생활화된 철학이 떡국에 고스란히 존재했다

 

통행금지가 해제된다는 호각이 불어제끼면

언제 왔냐듯이 문 앞에 장사진이 쳐졌고 대야에 불린 흰쌀에

순서를 매기는 일들은 아잇적부터 해 오던 거였다

모락모락 펴 오르는 김을 헤집고 쏟아지는 졸음과 눈꼽을 떼어내 가면서

때로는 졸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연장이 현재성에 대한 정체성이다

잇니 배긴 일들이다. 중독이니 마비니 하는 말들이 무력해 지는 이유이다

삶이고 문화고 정체성이니 더는 바벨의 언어가 아니고

무언의 소통 그 자체인 거였다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이 번에 찾아 오는 애인들 한테는 

쑥과 호박, 흑쌀과 현미 흰 떡 등으로 섞은 모둠을

한 가족 딱 한끼니 먹을 분량만 선물하겠다고...

손을 들 땐 엄지를 드는 사람에게만 그 혜택을 줘야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행여 장지를 드는 애인들은 국물도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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