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목(都市遊牧)

창고 재 발견

濟 雲 堂 2007. 11. 10. 23:14

창고 1

신흥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본격적인 창고들이 세워진다

구 시대 산물이라고 폄하했던 창고 무리들이

1999년까지 즐비했었다. 

리키다로 정미소, 가토 정미소, 奧田 정미소 등이

신흥동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인천에서 제일 먼저 정미업을 시작한 인천 정미소와 그 뒤를 이어

미국인 타운젠드 등이 정미 사업에 뛰어들고부터는

인천에 이러한 창고들이 비온 뒤 돋는 죽순처럼 세워지게 된 것이다.

 

창고들은 붉은 색조를 띈 벽돌들로 세워졌다

벽돌이 흔했다기 보다는 내구성이 좋았고

만들기도 편했으므로 벽돌로 지은 창고들은 봇물처럼 이어졌다

그야말로 봇물처럼 이었다.

지리적으로 인천은 이들 창고를 세울만큼 자연자원이 풍부한 도시는 아니다

서울과 매우 가깝다는 점, 경기 내륙과 수도권 일대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1차 상품, 소금, 소가죽 등을 반출할 목적으로

세워진 창고의 위세 만을 보더라도 저의를 짐작케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인천의 강점은 무한방향으로 열려 있는 바다이다

일제는 이러한 환경들을 적절하게 이용했을 뿐

우리는 그저 남 좋은 일만 한 것

앞으로 적나라한 평이 이루어지겠지만

자존적 문제와 민족적, 경제적으로 보아도 강제병합은 원천적인 문제점을

제기하는 악의 고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창고 2

우리는 과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민족적, 자존적, 경제적인

카테고리에서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시각의 프리즘을 통해서 나오는 색깔은

제한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한 한계성에 우리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비평은 자유로울 수록 더 높이 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비평의 손잡이는 사람의 손을 떠나서는

올바른 비평으로 남지 않을 뿐더러 칼 같은 무기가 된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게 되었다

 

앞의 그림 창고 1은 奧田 정미소의 일부를 개조해서 만든 자동차 정비소이다

낡기도 했지만 적산(적국의 재산) 처리 과정에서

임대 및 매도를 통한 재산 증식으로 변모되다보니 수혜자의 개성이

그대로 접목돼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창고 2 그림은 현재 모 재벌들이 아파트와 대형 마트를 지었지만

2000년 이전 만 해도 선경 창고로 이용되었던 가토 정미소 자리이다

 

얘기는 이렇다.

당시에 나는 이 건축물들은 보존해서

교육 대안 공간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었다

역사의 아픈 기억, 수탈과 침탈의 실증적 공간 나아가

실험적이지만 정미업에 관한 박물관으로 또는

역사의 현장성을 살려 인천의 근대성을 부각시켜

체험과 교육 그리고 부가 산업(관광)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면 인천의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된다고 운운 했었다

 

모 재벌에게 팔려 현재의 모습이 될 거란 얘기는 파다했으되

어느 누구도 저지를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IMF는 우리 경제의 거품과 미래상을 철저하게 현실화 시킨

일대의 대 사건이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앞서 나갔던 재래시장 상인들은

당신의 자녀를 모 마트에 취직시켜준다는 감언에 녹아들었고

일 거리 창출에 일조할 것이라는 또는 구청의 세수에 도움이 된다는

제안에 흐지부지 안개처럼 사라지는 냄비 열기가 되었다

 

통탄의 읍루를 마셨던 몇 몇 교수와 나 그리고  몇의 NGO는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의 대세에 순응해버린 아니 너무도 절박했던

참여자들의 경제적 고통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좌시해버렸다는 말이 옳다

물론 두고두고 와신상담하는 계기로 삼게 되었지만.

 

 

 

 

창고 3

어떠한 모습이 바람직하다는 제시는 단지 제시일 따름이다

실질적으로 당대가 품고 있는 이상적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당대의 몫이다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꿈꾸는 당대는 이상적 사회를 전제로 한 현재적

고통일 수가 있다는 얘기다

시민적 합의 구조와 거버넌스 행정의 미흡함은

반복적인 역사의 큰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새로운 교훈으로

획득할 따름이다.

 

요코하마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인천보다 이르게

외국에게 문호를 개방했던 동네이다. 그 네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아픔의 편린들이 곳곳에 있지만

우리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처세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위 창고 3은 이른바 적벽돌 창고(아카렌카)를 개조해

카페, 전시 공간, 연극 공연장 그리고 본래의 창고 고유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재 편성을 한 공간이다

 

설립 당시에 사용했던 동력 엘리베이터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관리도 꽤나 정성을 들이는 모습들이 마음에 와 닿던 공간이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연 마다 사람이 들끓고

이른 아침임에도 나와 같은 방문객들은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어느 모습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이 좋으냐는

치기 어린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므로

이 다음에 그러한 기회가 우리에게도 올지 모르므로

비교라는 족쇄를 마음에 채우지도 않았다

 

다만 회색 하늘에

비둘기 깃털 같은 구름들이 간간이 흩뿌리는

보슬비에 온 몸이 다 젖어버릴까

그 게 조금 염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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