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백팔적덕(百八積德)

濟 雲 堂 2007. 10. 13. 01:13
 

요즘, 가을은 가을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새벽녘 서늘한 바람을 슬그머니 실어 나르기도 해보고 여름내 축축이 젖었던 나무들에 마른 햇살을 쬐어보기도 하지만, 누차에 걸쳐 짓무르고 헤진 몸을 추슬러내는 일이 버거웠는지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엄청나게 쏟아 붓던 장맛비를 견뎌낸 과일나무들과 볏가리 그리고 절의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지난여름의 상흔을 생각하자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계절이 제 철답지 않다보니 사람들의 불만이 이구동성으로 쏟아진다. 자연재해다, 기상이변이다 혹은 다음 세상에 대한 은밀한 예고다 라면서 볼멘소리를 흘리고 다니지만, 우리사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인재’의 무거운 앙금을 정작 끄집어 올려 희석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숙제로 남는다. “사람과 관련돼 있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라는 k.마르크스의 생각이 무리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 상황의 해법과 그 실천방법이 화두로써 가치가 있는 것은 그나마 이 어두운 사회의 등불처럼 남모르게 제 자신을 산화시키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덕(德)이란 한자말은, ‘사람 열 네 명이 하나의 마음이 되었을 때’ 덕(德)이란 글자가 만들어진다고 <설문해자>는 설명하고 있다. 문득 덕이란 말을 지면에 던져 놓고 보니 불현듯 한 쪽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부메랑처럼 반동하여 되돌아오는 덕이란 놈이 ‘넌, 어때?’라고 받아친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혹시... 그래도 살면서 한 번 쯤 타인에게서 “당신은 덕이 많은 사람이야”라는 말 한 마디 들어본 적은 없나? 뇌까려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천공의 태양이고 그 빛에 눈이 부셔 고개 숙이고 서있는 초췌한 사내 하나가 그려질 뿐이다.

 우리네 전통적인 습속에 ‘백팔적덕’이란 아름다운 풍속은,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말이거니와 오늘 날에 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치 갈망해볼 의미가 있는 말이다. 사립문 밖에 행려자를 위해 밥 한 그릇 놓는다거나, 기근이 들었을 때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이웃의 곳간에 살며시 쌀 한 됫박 갖다 놓는 일 등은 차치하더라도 제 삶의 근저 오만가지에 생명성을 인정해 소중히 섬기는 태도는 매우 훌륭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 사회의 주장은 유기체적 삶의 법도와 행동양식을 요구하지만 그 이면에 ‘작은 손해는 감수해야 함’이란 의미가 내장돼 있음을 공유하지 못한 채 일방통행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거기서 비롯된다. 유기체는 섞이고 소통하고 관계를 맺어야만 존재하는 우주적 생명체인 것을. 가을이 가을답지 않은 건, 기상이변이 서럽게 다가오는 건, 유전자존 무전자망이 처절하게 느껴지는 건, 덕(德)을 쌓지 않아서이다. 누군가를 위해 조금도 손해를 감내하지 않겠다는 욕심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계절의 갈피를 넘기는 시점에서 내 일상의 기록장에는 한 구절 더 채워 넣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다음 가을이 올 때까지는 백팔적덕(百八積德)을 시도해보겠다고. <10. 12 사람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