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여고 100주년 (일부 사진)
인천에 근대식 교육 제도가 도입된 것은 1890년을 넘어서부터였다
제도라고 해서 거창한 형식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수적으로 상상 이하의 학생과 선생님으로 구성된 영화 학교가
인천에서는 최초의 근대식 교육(서양식)을 실시하게 된 것을
그 효시로 삼고 있다.
하기사 일본인들이 강화도 조약 이후로 개항을 약속 받은 부산, 원산에 비하면
늦은 시기였을 1882년. 공식적인 개항 한 해 전에 미리 들어와
할당 받은 토지 구획과 불하 조건들을(집을 포함해서) 맞추는 등의 작업을 하게 돼 개항 원년에 앞선 터 닦기에 몰두하는 통에
교육 시설을 설비하진 못했지만 발빠른 행보를 거듭해
거류민들의 자녀 교육에 힘썼다고 전해지는 것이 이른바 서당식
교육 기관 정도로 불려지는 사소옥(寺小屋)이 전부였었다
1885년부터 신흥초등학교의 전신인 심상고등소학교를 시작으로
그 체계를 밟아 가는데,
인천공립고등여학교는 1908년에 이르러 설립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천여고라 불려지는 학교의 전신 격이다
내년이면 이 학교가 개교 일백 주년을 맞게 된다
비록 일본인에 의해 세워졌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해방전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해방과 더불어 현대 교육의 발판으로 재 탄생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본다
자칫 미화될 소지가 없지 않지만 인천 여성 고등교육의 산실로서
봤을 때 손색없는 학교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위 사진은 1933년에 찍은 사진으로 1998년 현재의 연수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그 모습을 간직했던 인천여고의 현관 일부이다.
개교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1980년 후반까지 이 학교는 등나무와 은행나무
학교 담장을 뒤덮은 넝쿨들이 운치가 있었지만
현재는 그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전혀 다른 건물이 들어서게 되는
이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대로 역사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한 학교의 역사를 짚어내는 일이지만 아울러 그 속에 밴
당시의 문화적 행태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빠트릴 수 없는 일이다
위 사진은 1945년 2월에 찍은 인천 여고 정문으로 들어서는 학생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월간인천 소화20년)
우리가 흔히 몸빼바지라 일컫는 일복 겸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통해서
당시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 재밌는 이야기가 된다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여성에게도 당시의 사회적 긴장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랄 수 있다
원래 몸빼는 일본어 몬베( もんぺ )에서 유래돼 격음으로 부르게 되는
변화를 겪는다. 실제로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70년대 말에도
인천여고 학생들은 이 몸빼바지를 교복으로 입고 다녔으며
햐얗고 챙이 넓은 카라(깃)를 웃옷으로 걸쳤으므로
다른 여고 학생들하고는 차별화 돼 보이는 독특함이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 보아도 인천여고 학생들이라면
공부 잘하는 학교로 인식이 되어 선망이 되곤 하였다
인천여고가 백년을 맞게 되는 유구함 이면에는
인천을 대표했고 현재까지 인천의 여성계를 아우르는
막강한 에너지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아직까지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재들이 사회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와도
통하는 것이다
현재 이 학교가 들어섰던 자리에는 당시의 흔적을 알려주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장관을 이룰 것이다
이 은행잎들이 환골하고 탈퇴하듯이 빚어내는
옐로우의 물결을 감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지켜섰다가 그 광경을 사진에 담아야 겠다
그리고 당시의 담벼락 너머를 훔치듯 흘깃거리던 소년의 마음으로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다
지금 그...그 애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