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주점
신포주점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머릿 속 오랜 기억에 남아 있는 이웃 아주머니 품에 밴
술밥 냄새 같은 게 풍겨난다.
지금은 오래된 골목길 몸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한 세대 전에는 신포동, 아니 인천 최고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어
인천의 문화예술 판을 주름잡던 태풍의 눈이던 곳이 신포동 골목이었다.
신포주점은 창작의 격랑을 무덤덤하게 안아주던 몇 안되는 술집 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표적인 술집이었다.
얼핏 꼽으라면 가장 대표적인 명소였던 백항아리집을 필두로 미미집, 대전집, 마냥집, 염염집, 다복집 등이 떠오르지만, 어디 이들 만이
중심점에 놓여져 한 시대의 부침을 노래하지는 않았으리라
신포주점이나 백항아리집 등은 특히나 더 했던 곳이다
필자의 유년 시절에는 아버지를 찾으러 다녔던 곳이었고, 호기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의 보이지 않는 위압에 눌려 머리 긁적이며 뒤돌아 나오기 일쑤였던 곳이 이 두 집이었던 것이다. 사냥모자라 일컬어지는 도리구치를 질끈 눌러 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사람(조병화) 이에 걸맞은 품새에 눈이 부리부리하게 쏘아 보는 사람(우문국) 게다가 이필우 선생님(성악가)까지
소위 말해서 인천 문화예술의 어깨들이 밀집해 있었으므로 신출내기였던 필자는
자연스럽게 꼬리를 내리고 마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므로.
어쨌든 오늘은 신포주점을 읊조리고 싶다
세월따라 사라진 백항아리집 등은 후일의 노래로 남겨둬야 할 일이다.
신포주점 내부로 들어가면 위와 같은 작품들이 다른 술집에 비해 제법 많은 편이다
작품이 많이 내걸려 있음에 대한 전설이 들어 있음직하다
그렇다. 당사자 선생님들께 대한 인간적 폄훼가 아닌 그저 재미와 뜨거운 사연들이
훈증처럼 모락모락 감지 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위 불심이란 작품은 화가 정순일 선생님의 바탕 그림에 서예가 김인홍 선생님의 글이 덧붙여 공동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작품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는 답할 필요도 없이 술값의 대신이었다.
말 그대로 대신이다. 몸이든(身), 신세든, 세(外償)든 간에 술값의 대용이었던 것이다.
위 작품은 옥계 오석환 선생님의 '게'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밀린 술값 조로 받은 작품이라는
안 주인 김경숙여사의 넌짓 말이다.
애(愛) 자도 별반 차이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 또한 정순일, 김인홍 선생님 두 분의 공작일진데
어찌해 두 개 씩이나 있을까?라는 필자의 질문은 금새 우문이 되어버린다.
정순일 선생님은 평상시에도 술을 즐겨드시는 축이었는데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중독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셨는데
신포주점에 많은 셈을 놓치고 계신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사실, 위 두 분은 필자의 고등학교 은사이시다
가냘픈 몸이지만 힘찬 글이 뿜어져 나왔던 김인홍 선생님과
역시 흐느적 거리는(늘 술에 취해 계셨고 우유곽에 약주를 넣고 빨대로 빨면서 수업을 가르쳤....이렇게 말하면 맞아 죽을지도 모를라나?^^)깡마른 몸이지만
프랑스 배우 알랭들롱과 너무나도 유사했던 정순일 선생님.
이 두 분의 심성과 열정이 한데 섞여 만들어진 작품은
정념을 넘어서 지극을 향하고자 했음인데
연유를 떠나서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신포주점이란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 아닐지
'게'의 오석환 선생님이나 김인홍 선생님이나 구순을 너나드실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시지만 이제 칠순을 넘기신 정순일 선생님의 건강은 예나 제나
마음을 아리게 하고 있다.
고여 선생님에 대해서는 일설이 많지만, 이 분은 특히 조개 따위에서
추출해낸 윤기나는 각질을 이용해 비천도 등을 만드신 분으로
기억이 되고 있다. 혹시 인터넷 검색에 다른 얘기들이 뜨고 있을라나?^^
최병구 시인의 '꽃 같은 강산에'...
최병구 선생님 역시 신포주점의 주당(酒黨)으로
사연과 일화를 몰고 다니셨던 분이다
이 분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은 김양수 선생님(평론가)이 입이 닳도록
말씀하시는데 특히
술을 너무 따르(黨)다가 서울대에 진학한 아드님의 불의한 죽음에
위로차(?) 유해를 당신이 다녔던 술집 문지방에 일일이 몰래 묻었다는 일화는
돌아간 분 만큼이나 애절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생각이 예까지 이르다 보면 최병구 선생님이 살고 계셨던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한 켠이든 공원의 자투리 땅 일부이던 간에
시비 하나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김경숙 여사가 제일 달가워 하지 않는 그림이다 ^ ^
하필 술값으로 이 그림이 뭐냐며
최천수 선생님의 신세를 두고두고 하평하신다
잠시 둘러본 신포주점의 이야기는
한 세대 전의 격랑기를 거친 선배들의 인생과 문학과 예술혼은
한 세대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거냐는 질문은 종종 받는다
예술과 인생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면서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도
더러 받고 있는 즈음이 되었다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이러한 경험의 소산이 다분히 신포동이란 환경 때문이란
것을
한 없이 고마워 하고 있지만
신포주점 탁자 위에 올려진 공백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차라리 내가 술이라도 잘 마셨으면 빈대떡에 약주 한 사발 주문해서
빈 자리를 채워주고 싶건만
마음은 이미 취해 있고 생활의 가닥은 너무 떨어져 있어
어디든 몸둘 바를 모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어쩜 속알머리 없는 자리를 찾아 정확히 내려 꽂히는
속절없음이여 이 철부지 태풍 '나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