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돌

용동권번(龍洞券番)

濟 雲 堂 2007. 9. 12. 08:04

권번(卷番)이란, 흔히 일컬어 기생조합이라 하는 말인데

한자 말을 아무리 뜯어 놓고(測字) 깨어 놓고(破字) 봐도 우리네가 쓰던 말과는

어딘가 모르게 차이점이 난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일본 중세를 주름잡던 막부정권기에 생겨났다고 전해지는 번(番)에서 이름을 따

합성해 불렀다고도 전해지지만 확증이 될만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여하튼 권번은 뭇 남성들의 허리하학적(?) 욕구와 허리상학적(?) 욕망을 풀어주었던 우리 근대 시대의 산물임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다

특히, 허리하학적이라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데에는 성의 물리적 기능을,

허리상학적이라고 말한 데에는 문화적 욕망의 해소를 담아낸 필자의 말로서

초현실적 언어라 불려졌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과 대치 시켜본 장난말이다

이해해 주시길...

 

사람은 허리상학적 욕망에서도 귀기(鬼氣)를 발휘하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예술적 행위들이다

서도(書圖)를 비롯해 소리, 춤, 기악 그리고 말씀들의 향연으로 이어지는 모양새가

이미 깊이를 넘어서 경지에 오르게 되는 지경이면

어느 덧, 주와 객은 주객을 넘어서게 되고 객주를 넘어서

알지 못할 희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니, 그럴 것이다.

이런 교육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경우는 좀 낫다

그렇지 못하고 생활의 간난을 견디기 위해 들병을 들고 '들병어멈'소리를  들으며

항구로 공사판으로 전전했던 우리네 가까운 어멈들도 많았던 것이다

현덕의 소설 '남생이'의 주요 무대였던 인천항의 예가 그렇다

 

어쨌든 인천에 관기가 사라지고 권번이 들어선 것은 1902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식 구제를 실시하면서 일본의 제도를 수용하게 된 윗대 어른들의 노심초사를 뒤로 물리고

유심히 바라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해졌던 권번류(類)의 탄생은

인천에서도 활기를 갖게 되는데

우선 무허가로(?)로 영업을 행했던 와정동(옛 신흥동) 일대와

부도유곽(敷島遊廓)으로 알려진 신흥동 사거리 시장일대

만석동 매축지에 팔경원(八景園) 등이 들어서게 된다

 

사람이 고이면 고이는 만큼의 사회적 유기성을 잃지 않는 게 사람의 본성이런가?

창기를 가르치는 선생도 나타나고

소리로 유명해지는 창기도 나타나고

화대 또는 대좌(貸座) 요금을 받아 챙기는 족속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창기라고 말하기엔 억지가 있지만 관기를 가르치던 취은 김병훈 선생

소리 가락이 팔도에 번졌던 이화중선과 춘원도 사모했던 변혜숙 등이

인천 용동권번 출신이고 보면

세상만사가 다 대동이고 소이인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인천의 용동권번이 수축(修築) 되었음을 표시하는 석축의 흔적을 바라보며

요지경 같았을 당대의 생활사를 가늠케하고 있는 돌계단 위를 걸으며 묘한 가슴의 떨림을 체험한다

아마 나도 그 때 태어났었다면 이라고... 별들에게 물어 본다 ^ ^

 아마 부랄 달린 거개의 인물들의 생각도 대동이고 소이일 것이다

이런 와중이니 오죽했겠는가? 위생이 어딨고 진득한 정념이 어딨겠는가

1931년의 창기 정기 검진 상황을 엿보면 가히 짐작의 더듬이가 놀라 소스라칠 정도로

우리네 살림살이는 열악을 넘어 굴욕적이었음을 알게 한다

일본인 창기 수진자 연 인원은 2.516명, 조선인 창기 수진자 연 인원 2.151명

거기에 매독 걸린 창기와 마약 중독 창기가 일본인 50명, 조선인 109명 등등의

기록들은 여린 뭇 가슴을 쓸어내리기에 충분한 수치가 아닐까?

1932년 개설한 인천부립병원(도립병원 전신)의 강제치료명령을 받은 9명에게는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절개 수술판정까지 내린 것을 보면 표면화 되지 않은

숫자는 짐작조차 어렵게 만들게 한다 

 너무 흰소리만 했던 것 같다

위의 표석들을 보면서 시나브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말이 가지를 치게 됐고 더 많은 자료가 있음에도

차마 올리지 못함의 이면에는 성매매로 비롯하는

여타의 습성들에 대한 애련이 깃든 까닭이다

 

위의 표지석들은 애관극장 뒤 편, 모 모텔 사이 계단에 아직도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