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자료1
인천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근대 개항장 일대를 중심으로-
이 종 복(시인. 개항장 역사문화 연구소장)
1.
소래산을 꼭두머리로 해서 관모산, 상아산, 만월산(주안산), 철마산, 계양산 등으로 이어지는 산의 꼭지점들을 점점이 이어서 보면, 백두대간의 굳센 근육들이 인천이라는 도시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뻗어 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백두대간의 기운이 녹녹히 서린 땅에서는 사람이 살기에도 좋고 또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인천 지역에 살았던 선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일백 여 기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문자의 활용이 활성화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단지 추론할 따름이지만, 그 규모와 위세를 더듬어 보면,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강력한 지배 구조 아래 세워졌으리라는 추측들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들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부터, 우리는 선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통하여 많은 인천의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추홀 왕국을 세운 비류왕을 위시해서 인천(또는 인주) 이 씨의 시조인 이허겸, 그의 자손인 이자겸 그리고 고려 왕가의 5명의 왕(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의 어머니, 5명의 왕(문종, 순종, 선종, 예종, 인종)의 왕비들은 역사의 기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인천의 인물들입니다. 이 외에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인천 사람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지면의 제한을 핑계삼아 조선 시대까지의 인물들은 여기에서 일단락을 맺어봅니다. 근대시기로 넘어가 보면, 어두웠던 시대였던 만큼 더욱 더 많은 빼어난 인물들이 시대의 등불로써 우뚝 서 있었음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신태범 박사의 아버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광제호’의 함장 신순성. 장면, 장발, 장극 삼 형제 박사를 배출했으며 개항 당시에 인천 해관에서 통역 업무와 당시에 척박했던 영어교육의 현장에서 열정을 쏟아 부었던 장기빈. 오늘날까지 3대를 잇는 한의원(대제한의원)을 펼치게 했고, 초창기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조합을 결성했으며 또한 인천 권번(券番)의 기생들에게 학문과 기예를 가르친 김태진 원장의 할아버지 취은 김병훈. 약소국가의 힘의 배양은 교육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주창하며 사립 ‘제녕학교’를 세운 서상빈. 점자책 ‘훈맹정음’을 새로이 제창, 앞 못 보고 살아가던 시각 장애인들에게 빛이 되어주어 일명, 시각 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받들어지는 송암 박두성. 인천 우체국의 초대 국장으로 취임했으며 당시의 청소년을 중심으로 ‘소년 척후단’을 결성하여 민족의식을 드높인 월남 이상재와 단장으로 취임한 곽상훈 등은 암울했던 근대시대에 인천의 등불로써 귀감이 되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분들 이 외에도 여성 야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박창례, 이옥녀. 인천 최초로 선박회사 ‘이운사’를 세운 민영준, 우경선. 민비 시해범을 살해하고 인천 감옥소(인천 감리서 내)에 수감됐던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를 도왔으며, 민족 자본의 형성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천 객주회’. 관립 인천항 외국인 학교 교장 강화석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치 훌륭한 업적을 쌓은 많은 분들이 인천을 빛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천은 백두대간의 힘 찬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곳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2.
땅의 모양새로 보면, 인천은 한 덩어리지만 소담스럽게 이어진 산맥을 중점으로 두 개의 큰 축. 부평과 인천이라는 지역이 사이좋게 나뉘어져 있음을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산맥의 지세는 바다를 향해 활시위를 잡아당긴 모양을 그려낸 듯, 커다란 포물선 바깥은 오밀조밀한 주택들이 들어차 있으며, 비교적 도로의 정비가 잘 돼 보이는 곳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천이고요. 드넓게 일궈낸 대지를 계양산의 억센 팔뚝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은 듯이 보이는 땅. 초고층 아파트 군락과 대비되어 보이는 낮은 집들, 그리고 정갈한 논들이 바둑판처럼 성글어 있는 곳이 인천 속의 또 다른 인천인 부평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져 있는 대칭축에서 지세의 정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또 다시 남쪽 방향으로 상서롭지 않게 서려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문학산 일대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세분화해서 땅 모양을 설명하면 문학산을 중심으로 연경산, 노적산 그리고 청량산 인근으로 이어지는 산세와, ‘먼우금’ 또는 ‘원우이’로 불려지는 연수동 일대로 다시 나눠볼 수 있는데, 이 일대를 이름하여 인천 안에서도 옛 인천으로 불리어져 ‘원인천(原仁川)’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인천의 땅 모양새를 세심히 살펴보면, 크고 작은 세 덩어리로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세 지역은 서로 다른 생소한 정서를 자아내어 자못 이질감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으로 보여져 외형상의 불안전구조의 모습을 띈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광역의 인천을 의도적으로 편가르거나 기형적인 구조를 지닌 공간이라고 평가하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교훈과 사실감 넘치듯 흥미진진하게 살아온 선인들의 삶의 현장들, 그 역사의 향기가 절절이 흐르는 인천 땅을 꼼꼼히 되짚어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과연 인천의 어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3.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근대 시기의 개항장 일대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절대절명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낸 곳입니다. 앞서 거론했던 바와 같이 인천 안에서도 세 지역의 역사 및 문화 대별론은 어느 정도 공론화 된 이야기로서, 개항장 일대를 제외하고는 인천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왕성한 연구가 펼쳐졌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항장 지역.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시기의 개항장 지역은, 인천이라는 이름이 근대 역사의 무대를 통하여 학자들 간에 재조명될 무렵 이전에는 연구 실적이 미미했거나 외국과 일본인들의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100여 년 전에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하여 인천의 모습을 묘사했던 영국의 여류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낡고 한적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정주 인구조차 많지 않았고 지방으로써의 용도보다는 변방의 개념으로써, 거의 전략적이고 전시의 방어 개념으로써 조성되었던 이유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8세기 조선 정부가 발행한 ‘해동지도’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인천은 진지(鎭地)의 개념으로써 제물진(濟物鎭)이라 불렸고, 삼남 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써 제물포(濟物浦) 또는 제물량(濟物梁)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이러한 용도에 비추어 보아 인천은 세곡의 운송과 군사적 목적을 지닌, 다분히 정부용으로 맞춰진 채 외부와는 비교적 부자유스러운 관계성을 지녔던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어쨌든 과거의 개항장 지역은 의도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늘날의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18~ 19세기 무렵. 조선의 개항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서양 열강들의 잇따른 무력시위가 이어지던 시기에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제국주의와 일본 군국주의는 자국의 경제, 정치, 군사적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약소국들을 유린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저들의 희생양 중의 일부로써 조선은 “동방의 금 쪽들이 흘러 넘치는 처녀지”같은 곳으로 보여지기도 했었습니다. 어쨌거나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 과정 속에서 인천은 저들의 손아귀에 쉽사리 쥐어졌고, 열강들의 영사관 및 무역회사의 발빠른 설치에 따라 그 외형이 순식간에 변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일본, 중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인천 안에는 각 나라의 ‘지계’가 설정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이들은 완전한 치외법권적 자치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경제적으로도 대외 무역의 비주류로 전락한 조선정부는 열강들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하부 노동구조(헐값의 노동)와 약소국의 악순환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의 산물들은 헐값에 팔아 넘기다시피 하여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갔으며, 이와 맞물려 정치적 갈등의 첨예로 치닫게 되어 결국에는 나라마저 빼앗기고 마는 형국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천 특히, 개항장 지역은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흔적들은 개항장 지역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는 근대 건축물들. 근대 개항 초기부터 지어졌거나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건축물들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인 역사의 단면일 수도 있으나, 역으로 보면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한 시류를 풍미했던 인천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어찌 되었든 우리의 현실이고 또한 미래 역사를 짊어지고 가야할 오늘의 과제임에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5.
당시에 만들어진 건축물 가운데에는 아직까지 현존하거나,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은데, 쓰임새에 따라 몇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보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열강들의 행적, 나아가 인천이 어떻게 변모되어 갔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일본영사관을 필두로 해서 청국 영사관, 러시아 영사관, 독일 영사관, 영국 영사관 등의 관청.
둘째. 일본 18은행, 58은행, 조선은행(제1은행) 등의 금융기관.
셋째. 내리교회, 성공회, 답동성당, 동본원사, 묘각사(서본원사), 인천신사 등의 교회 시설.
네 째. 심상 욱 소학교(신흥 초등학교), 창영 초등학교, 영화 초등학교, 박문 초등학교, 여 선교사 기숙사 등의 교육시설.
다섯 째. 세창 양행(독일계), 홈링거 양행(영국계), 담손이 양행(미국계 타운젠드), 미두 취인점, 해관(이 후 세관으로 바뀜), 일선 상선 주식회사, 일본 우선 주식회사, 중국인 점포 주택, 대불호텔(중화루), 해리스 호텔, 애관극장(협률사), 표관, 가부기좌, 인천좌 등의 상업시설.
여섯 째. 외국인 묘지, 기상대, 제물포 구락부, 인천 우체국, 웃터골 운동장(제물포 고교), 공회당, 만국공원 등의 공공시설.
일곱 째. 홍예문, 월미도 축방(연륙교), 축항(도크) 등의 축조물.
여덟 째. 일본제분(이 후 대한제분으로 바뀜), 일본철강(동국제강과 INI스틸 일대), 스탠더드 석유주식회사(월미도 군부대) 등의 산업기반 시설.
아홉 째. 세창양행 사택, 쉬르바움 주택, 모오스 저택, 헨켈 저택, 데쉴러 주택(大是羅), 제임스 존스톤 별장(일명 인천각), 닥터 호레이스 알렌 별장, 사토오(濟藤)별장, 여 씨(呂 氏) 주택, 오례당(吳禮堂) 저택 등 인천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의 독특한 서양식 주거시설.
열 번째. 약대인(藥大人) 병원(일명 성루가 병원), 일본 부립 인천병원, 해성병원(답동 천주교) 등의 병원 시설들이 개항장 일대에 포진해 있었으니, 가히 서양의 건축물들을 인천에 옮겨놓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제반 건축물들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현재에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일부는 훼손된 채 흔적만 남아 있거나 그 흔적을 유추해 낼 수 있는 터만 있을 뿐, 현존 상태는 매우 나쁜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다다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동족간에 치른 한국전쟁 특히 인천 상륙작전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음을 다 함께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인천의 근대 개항장 일대의 형성과정과 건축물에 대해서 설명 들음으로써, 1883년 개항당시부터 어떻게 변화해 갔으며 어떠한 상황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근대 문화의 태동과 서양문화의 접목 등을 아우르는 일대의 문화 대 충돌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강의와 현장을 체험함으로써 과연 무엇을 느꼈고, 인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부록 1. <참고자료: 일부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