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맨 이 계복 씨
1943년 서울 종로 출생
필자는 이 계복 씨를 형님이라 부른다
때론 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형님이라는 존칭을 꼭 붙여 부른다
나이도 물론 많거니와 행색에 비해 여간 박식한 것이 아니어서
살아온 연륜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그렇게 부를 때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지 않을 때는 형님에 대한 필자의 심사가 꼬여 있거나
뒤틀려서인데, 이상한 것은 그럴 때에도 형님은 내게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벽 같이 찾아오거나
술이 목울대까지 차서 비틀거리며 찾아 올 때가 보통 그런 때인데
형님의 재산 목록 1호인 자전거 앞에 매달은 라디오를 최대치로 올리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듯 부르는 노래는 시쳇말로
눈 뜨고는 못 봐주고, 귀 열고는 못 들어줄 만큼 괴이한 행태는
필자를 비롯해 주위 사람들을 괴로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과 같았다
칼 오프의 까르미나부라나를 들어 본 적이 있다면
영락없이 그 톤에 저주를 듬뿍 실은 궤멸찬 육성을 상상해보라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게다가 어느 예쁜(본인의 표현) 여인네를 꼬드끼려다
그 여인네에게 주먹으로 맞아 휑하게 비어 있는 앞 이빨 자리를 채우며
쏟아지는 불완전한 목소리는
괴로움을 한 층 배가시키는 구실까지 하였으니...
칼맨이란 별명은 고연스레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클래식를 너무도 좋아해 자전거를 끌며 지나다닐 때마다
F.M 라디오 방송 6*.*를 줄기차게 틀고 다니는 것은 예사고
칼 갈아서 번 돈으로 클래식 테잎을 빈번하게 사들이는 습관적인
모습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칼맨이란 별명을 지어줬던 것이다
비운의 운명을 형상화한 가곡 카르멘의 주인공처럼
본인도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지 그 별명에 대해서
싫은 내색을 하긴 커녕 오히려 제 자신을 자랑스럽게 부르며
다니곤 했다
형님과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스무살에 자전거와 함께 출가해서
사십여 년을 총각으로 살고 있다는 것
토굴을 파 겨울을 난다는 것 특히 계양산 일대에...
불 장난을 좋아해서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불지르지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로 인한 불상사는 한번도 없었다는 것(믿거나 말거나)
역시 칼 갈아서 번 돈으로 수도자처럼 생식을 즐긴다는 점 등등은
형님의 기이함을 엿볼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전국을 이 잡듯이 다녀서인지 지리적 감각 또한 대단한 경지여서
웬만한 지역은 손금보듯 잘 아는 듯 해 보였다
어느덧 형님은 나이 예순 중반의 문턱을 넘어선 초로가 되어 있었다
필자와 알고 지냈던 이십여 년 전 '짐'다방의 신화도 낡은 이야기가 됐지만
이제 증상조차 모르는 통증을 안고 살아 가는 노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짐 다방은 80년대에 오로지 클래식 음악만을 틀어주던 곳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소위 판돌이(DJ)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당시의 인연이
이렇게까지 흘러 왔던 것이다
당시에 짐에서 판돌이를 했다면 꽤나 실력을 알아주는 분위기였다
예의 현재 청소년 합창단 지휘자나 시향 지휘자 남성합창단 지휘자
모 음대 교수 등등을 배출한 명소이기도 했던 이유였다
물론 필자를 제외하고 말이다.
어쨌든 80년대라는 격동기 문화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필자를 비롯해 이 계복 형님도 그 축에 드는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위 사진은 오래 전에 박아 둔 사진 두 장을 연이어 디카로 조합해서
만들어 봤다. 날씨가 궂다.
오늘 새벽에 또 형님이 오시려나
반가움은 3초다. 나머지 삼십 분은 어디로 향하지? ^^